[행성역사위원회] 11화

2018-09-2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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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표지
[데일리게임] 11화
앤지(2)

앤지는 마치 제3자의 이야기를 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단 두 식구가 여태 살아왔다고 했다.
별로 부유한 편은 아니었으나 머리가 좋은 덕분에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졸업했고, 현재는 한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연구소가 이 근처로 이전을 하는 바람에 이 찻집에 자주 들르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 이 찻집에 왔는데 이 구석 자리가 너무나도 편안한 거예요.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여기 와서 편하게 앉았다 가는 게 즐거움이 돼 버렸죠.”
그런데 야근도 많은 데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어머니가 계신 지방에 다녀오느라 마음만큼 자주 오지는 못했다고 했다.
“아, 그러셨군요. 근데 어머니는 좀 괜찮아지셨나요?”
이슬휘는 앤지의 표정으로 봐서 어머니가 좋아지셨을 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그러나 앤지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뇨, 돌아가셨어요.”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전 앤지 씨 표정이 밝아 보여서 완쾌하신 줄 알고 그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슬프다고 슬픈 표정만 짓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럴수록 더 밝게 살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왜, 지난번에 제가 한동안 여기 못 올 거라고 말씀드렸었죠?”
“네, 그랬었죠.”
그날 이후로 내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때가 고비였어요. 그래서 휴가 내고 집에 가서 어머니랑 같이 지내다가……. 돌아가신 후에 장례 지내고 올라온 거예요.”
“아, 그땐 일하러 가신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하, 그건 슬휘 씨가 걱정할까 봐 그랬던 거고요.”
“아아, 그랬군요…….”
이슬휘는 뭔가 앤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어쩌면 ‘미래가 불행하기 때문에 현재에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던 소현 세자의 생각과 비슷한 것일 거라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의 생존 이유이자 목적인 것이다.
이슬휘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구에 와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지구인들처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나? 임무를 통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럼 무엇을 통해?
이슬휘는 여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자기의 행복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슬휘가 자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이슬휘는 갑자기 자기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보였다.
지구에서 그토록 오래 살면서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었고 알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든 조직이든 개인이든 그 정체성은 역사를 통해 쌓이는 것이다.
즉 내 삶의 역사를 통해 나의 내면에 쌓이는 ‘무엇’들이 나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슬휘는 새삼스럽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에 푹 잠겨 버렸다.
앤지가 계속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마음은 반대로 점점 어두워져갔다.

***

그들은 찻집에서 다시 만났다.
이슬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과는 별개로, 앤지를 만나면 행복했다.
앤지의 밝은 표정도 좋았고 구김 없이 환한 웃음도 좋았다. 그리고 앤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았다. 그런 앤지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슬휘는 어느덧 앤지가 자기 존재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앤지를 만나기 위해 민자영을 만난 것일 수도 있었다.
지구인들이 말하는 운명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근데 앤지 씨가 다닌다는 연구소는 뭘 연구하는 곳인가요?”
“아, 제가 다니는 데요? 재미없는 데예요. 맨날 이론만 따지고 계산만 죽어라 해 대는 곳이죠.”
“이론을 따지고 계산을 하는 곳이라……. 혹시 물리학 관련 연구소?”
“아니, 어떻게 금방 아셨어요? 우와, 슬휘 씨는 도사다, 도사.”
“하하, 그냥 짐작을 했을 뿐인데요, 뭘. 재밌겠는데요? 저는 역사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물린데.”
“어머나, 물리를 재밌다는 사람은 저 말고 처음 봐요.”
“사람들이 그 재미를 몰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맞아요. 물리라는 건 우주의 법칙을 공부하는 학문이잖아요? 그 법칙을 찾아내고 적용하고 예측하고…….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우우웅.
그때 탐지기의 알람이 울렸다. 이슬휘는 앤지를 의식하며 얼른 알람을 껐다. 그리고 눈을 든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기 앞에 앉아있던 앤지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앤지가 마시던 카피잔도 사라졌고 앤지가 앉았던 자리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예전처럼 1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슬휘는 순간 자기 뇌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이슬휘는 숫자를 세어 보고 볼을 꼬집어 보고 시각을 테스트하는 등 뇌를 점검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 그렇다면.’
많은 가능성을 떠올려 본 끝에 이슬휘의 추측은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졌다.
과거의 버그에 의해 현재가 왜곡돼 버린 것이다.
즉 탐지기에 걸린 버그가 앤지의 존재와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과거로 가서 버그를 제거하면 앤지가 다시 돌아오겠지만 위원회에서 왜 지구인과 관계를 맺지 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슬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갔다. 그는 타임머신에 들어가기 전에 아카식레코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앤지의 존재와 연결된 그 사건을 찬찬히 세심하게 점검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앤지와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한 사람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의 파장이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 딱 두 가지뿐이다.
직접적인 영향은 인과관계가 명확하니 더 따질 것도 없지만, 간접적인 영향은 그 인과관계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브라질에서 한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에서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바로 나비효과이다.
말이야 쉽지만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다.
그 나비의 날갯짓이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연쇄반응을 일으켜 마침내 미국의 태풍으로 발전했는지는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들여다봐야만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슬휘는 앤지와의 연결 고리 찾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휘는 씁쓸한 마음으로 타임머신을 작동시켰다.

***

1330년 봄, 이슬휘는 경기도 양주의 천보산 자락을 천천히 걸었다.
봄꽃들이 만개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다만 아직 남은 겨울의 기운이 간혹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약하게 느껴졌다.
과거로 돌아오면 무엇보다 좋은 것이 때 묻지 않은 자연이었다. 매연도 없었고 황사도 없었고 미세먼지도 없었다.
이슬휘는 심호홉을 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때 저 멀리 언덕 아래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이슬휘가 만나야 하는 그 사람이었다.
그는 소전거사(素佺居士)라고 불리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수년 전부터 천보산에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태소암에 기거하며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물론 이슬휘는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슬휘가 아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그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점점 이슬휘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훤칠한 키에 깊은 눈동자와 함께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슬휘는 그를 쳐다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니, 소전거사님이 아니십니까?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다니 반갑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이슬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나를 아시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소이까?”
이슬휘는 아카식레코드에서 본 그의 행적 중에서 그의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한 적당히 오래된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하며 그곳에 자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 그때 그곳에 계셨단 말이오?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해 면목 없구려.”
“아닙니다. 오래된 일이니 기억을 못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게다가 소생은 그때 먼발치에 있었으니 더 그럴 수밖에요.”
“하여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그나저나 다시 통성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예, 저는 이슬휘라고 합니다. 푸른 구슬 슬 자에 빛날 휘 자를 씁니다.”
“그렇소?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여기는 어쩐 일이시오? 이곳은 외진 동네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아, 예. 여기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가 볼만하다고 해서 둘러보려고 왔습니다.”
“아, 회암사? 아무렴, 볼만하고말고요.”
“근데 거사님께서는 어디에 기거하십니까?”
“나는 회암사에서 더 올라가 태소암이란 암자에 기거하고 있소이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소생이 여기 며칠 머무는 동안에 찾아뵈어도 괜찮으실는지요?”
“물론이오. 만나서 차도 한 잔씩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도록 하십시다.”

***

이슬휘는 소전거사에게 아무도 모르는 한 동굴을 알려 주어야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소전거사가 자기 혼자 힘으로 찾은 것처럼 느끼도록.
원래는 그가 혼자 산행을 하다가 발견하여야 하나 버그에 의해 산행 방향이 달라지면서 동굴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그 동굴에는 한민족의 상고사에 대한 자료가 숨겨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민족의 시원에 대한 호기심과 학문적 열정으로 그쪽 분야에 대한 지식수준이 상당히 높은 소전거사였다.
그런 그에게 그 자료가 전해지면 고기가 물을 만난 듯 그의 갈증을 채워 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대대손손 이어질 것이었다.
이슬휘는 소전거사와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한민족의 장구한 역사와 위대함에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슬휘는 자기가 아카식레코드를 통해 접한 정보 중에서 그가 나중에 혼자 힘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 알려 주었다.
그 후 그가 이슬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는 하루 종일 이슬휘를 붙잡고 한민족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러웠다.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고향 별의 자기 종족 중에도 이처럼 자기네 종족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이슬휘는 소전거사와 헤어져 회암사로 내려오는 길에 개울 옆 바위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보름달이 밝게 비추는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제각기 빛을 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고향 별은 어느 것일까.
갑자기 자기 처지가 처량해 보였다.
고향이 어딘지도 모른 채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혼자 외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도 내 고향 별을 위해, 내 종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을까…….
그건 참 부질없고도 불가능한 꿈이었다.
갑자기 앤지가 보고 싶었다.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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