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역사위원회] 14화

2018-09-2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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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표지
[데일리게임] 14화
초원의 바람

왕은 막사 앞에 서서 서쪽으로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왕의 나이는 어느덧 80대 중반이었지만 여전히 허리는 꼿꼿했고 두 눈에서는 아직도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이제 출정 준비는 끝났다.
유연에 보냈던 사신이 가지고 돌아올 약속 날짜만 받으면 되는 것이다.
왕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전쟁에 나선 적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이번 전쟁은 전쟁이랄 것도 없는 쉬운 상대였지만 전쟁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왕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대왕 마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옵니까?”
돌아보니 건장한 청년이 예를 갖추며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오, 나운이구나. 어서 오너라.”
왕의 표정이 금방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자기가 너무 오래 사는 바람에 아들을 먼저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남긴 혈육이 바로 나운이었다.
왕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기 위해 손자에게 최선을 다했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직접 나서서 공부를 시키고 무술을 단련시켰다.
손자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이처럼 전쟁터에도 데리고 다니며 전략과 전투를 경험하게 했다.
“다들 대왕 마마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어서 가시지요.”
“그래, 그러자꾸나.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아주 많이 고프구나.”
왕은 손자를 앞세워 막사 중앙으로 발길을 옮겼다.

***

이슬휘는 멀리서 장수왕과 훗날 그의 뒤를 이어 문자명왕이 되는 손자, 나운이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위엄이 서린 갑옷 안에서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웃고 있는 장수왕의 표정이 묘하게 어울려 보였다.
때는 479년, 장수왕이 지두우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장수왕은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지두우까지 진출하여 지두우를 유연과 함께 분할 통치할 계획이었다.
지두우는 고구려와 팽팽한 긴장 관계에 있는 북위가 북방 민족 물길과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북위와 물길이 군사적으로 연합하면 고구려로서는 북쪽과 서쪽으로 전선을 확장해야 하므로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수왕은 마침 북위에 대항할 세력 확보를 위해 지두우를 칠 계획을 가지고 있던 유연과 연합하여 지두우를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연에 갔던 사신이 협공 날짜를 결정해서 가져오면 출정하려고 준비를 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 버그가 발생하여 장수왕이 출정을 못 하게 되어 버렸다.
이슬휘는 그것을 바로잡으러 온 것이었다.

***

장수왕의 막사 안에 크고 작은 횃불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장수왕은 막사 한쪽 끝에 앉아 있고 장수들은 그 앞에 장수왕을 향해 서 있었다.
“이번에 지두우를 점령하는 것은 북위와 물길의 연합을 방해하는 뜻도 있지만 더 큰 의미도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장수왕이 장수들을 향해 말했다.
장수들 앞쪽에 갑옷을 입지 않은 책사가 나서며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이번에 지두우에 진출하게 되면 우리의 조상들이 처음 살기 시작했던 성스러운 호수에 바싹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소. 성스러운 호수 어디에 그 옛날 환웅 천왕께서 세상을 다스릴 때 사용하던 천부인이 묻혀 있다고 하오. 우리가 그 천부인을 찾기만 한다면 북위뿐이 아니라 온 세상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강성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오.”
장수 중 하나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듣자 하니, 흉노 중의 일부가 서쪽으로 가서 서쪽 땅 끝을 모두 정복하고 거대 제국을 세웠다고 하던데 까짓것, 우리도 그런 거 한 번 해 봅시다!”
“좋소!”
“합시다!”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장수왕이 손을 들어 왁자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이제 며칠 후면 유연에 갔던 사신이 돌아올 것이오. 그러면 바로 출정할 터이니 장군들께서는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 주시기 바라오.”
“예! 알겠사옵니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장수들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

왕의 막사에는 장수왕과 나운만 남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천부인의 전설이 과연 진실일까요?”
나운이 물었다. 거추장스러운 예의를 벗어 버리고 손자와 할아버지 간의 친근함이 담긴 말투였다.
“그럼, 나는 틀림없는 사실이라 믿고 있다. 이번에 기회가 왔으니 꼭 찾아내도록 해 보자.”
장수왕의 말투에도 아까의 그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손자를 향한 따뜻함만이 녹아 있었다.
천부인은 흔히 풍백, 우사, 운사 또는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이라고 알려져 있다.
옛날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나라를 세울 때 환인에게서 받은 상징물이 천부인이었다.
하지만 천부인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라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신묘한 능력이 있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고 자연재해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고 나라를 부강하게 해 준다는 전설이 담겨 있었다.
천부인은 단군 조선을 거치는 동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으나 단군 조선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장수왕이 점령한 어느 지방에서 천부인이 성스러운 호수, 즉 바이칼호수 어디에 묻혀 있다는 전설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장수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은밀하게 사람을 풀어 알아봤는데 꽤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리고 천부인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까지 알아온 것이었다.
그 후 장수왕은 어떻게든지 바이칼호수 쪽으로 진출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드디어 이번에 그런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럼, 천부인만 있으면 우리나라가 세세무궁토록 세상을 다 다스릴 수 있게 되겠군요.”
“하지만 나운아. 천부인을 가지고 있던 단군 조선도 망하지 않았느냐? 천부인이 아무리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지.”
“그걸 사용하는 사람……요?”
“그렇지. 그럼 그게 누구겠느냐?”
“나라의 왕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맞다. 나라의 왕이 현명하지 못해서 그것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신묘한 능력이 있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그러니 너는 명심하도록 하여라. 제대로 된 왕만이 백성을 지키고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장수왕은 인자한 표정 뒤에 걱정을 담아 손자를 쳐다봤다.
자기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을 손자였다.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보통 집안의 할아버지, 아버지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천부인이라는 상징물에라도 의지해서 나라를 잘 다스려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것이 장수왕의 가슴에 감춰져 있던 이번 출정의 숨은 이유였던 것이다.

***

아침이 밝았다.
푸른 초원 위로 해가 솟아올랐다.
장수왕은 장수들을 집합시켜 조회를 열었다.
그때 밖이 시끄러워지더니 군사 하나가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왕 마마, 사신이 당도했사옵니다.”
곧이어 유연에 보냈던 사신이 들어와 인사를 하고 품 안에서 서찰을 꺼내 장수왕에게 내밀었다.
“유연의 가한께서 대왕 마마께 어서 빨리 지두우에서 만나자고 하셨사옵니다.”
장수왕은 서찰을 펼쳐 읽어 보았다.
잠시 후 장수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찰을 내려놓았다.
모든 장수들이 장수왕의 말을 기다렸다.
“드디어 유연도 준비가 끝났다 하오. 그러니 우리도 내일 당장 출발하도록 합시다. 모두 그렇게 알고 준비들 하시기 바라오.”
“예. 알겠사옵니다.”
장수들이 막사 밖으로 나가며 큰 소리로 부하들을 부르고 명령을 내렸다.
그 바람에 진영이 소란스러워지며 갑자기 활기가 넘쳐나는 시장 바닥처럼 되어 버렸다.

***

이슬휘는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워 앤지를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왜?
요즘 이슬휘의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두 단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경찰에서도 이미 공개적으로 찾고 있었지만 먼지 한 알갱이만큼의 단서도 없었다.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앤지를 찾기는 찾아야 할 텐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슬휘는 하늘을 향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진영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이슬휘는 몸을 일으켜 그쪽을 보았다.
장수들과 군졸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리치는 것으로 보아 출정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이슬휘는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 진영과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

지나친 의욕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나운이 딱 그런 꼴이었다.
나운은 출정을 앞두고 자기 말을 좀 더 길들이기 위해 홀로 초원으로 나섰다.
할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말이었는데 아직 야생성이 강해 좀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나운은 푸른 초원을 마음껏 달리며 방향을 바꾸고 가속을 하고 속도를 줄이는 등 말과 한 몸이 되는 훈련을 했다.
말과의 교감이 흡족할 만큼 이루어졌을 때 나운은 방향을 돌려 진영으로 향했다.
진영은 거의 지평선 끝자락에 있는 것처럼 가물가물했지만 말과 함께라면 전혀 걱정할 거리가 아니었다.
“히이잉―.”
나운이 진영을 향해 출발하려고 할 때 말이 무엇을 보았는지 멈칫하며 길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운이 주변을 둘러보니 늑대 무리가 자기 쪽을 향해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한두 마리라면 어떻게 해 보겠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진영이 너무 멀리 있었다.
나운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일단, 무조건 진영을 향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운이 말의 배를 걷어차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늑대들도 거의 동시에 나운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이어졌다.
드디어 진영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여기! 도와줘―!”
나운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진영 안의 몇 사람이 자기를 보았다고 느꼈을 때, 말이 무엇에 걸렸는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운은 말과 함께 쓰러지면서 땅바닥에 내팽겨져서 몇 바퀴나 구른 다음 쭉 뻗어 버렸다.
나운은 사람들의 외침 소리와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한 얼굴이 쓰러진 자기 얼굴 위로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슬휘는 나운이 의식을 잃는 것을 보고 탐지기를 조작해 나운의 몸을 스캔해 보았다.
예상대로 팔과 다리의 타박상 말고는 다친 곳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되어야 정상인 것이었다.
그런데 버그가 생겨 나운이 굴러 떨어지면서 하필이면 큰 돌에 머리를 다쳐 생사가 오락가락하게 되고, 그 바람에 장수왕의 지두우 출정 역사가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이슬휘는 그 위치의 돌을 뽑아 다른 곳으로 던져 버리고 결과를 확인한 것이었다.
사실 이슬휘는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해 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나운을 생각하니 좀 안됐기도 해서였다.
하지만 자기의 사소한 배려가 앤지를 사라지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서, 앞으로는 빼지도 더하지도 않고 역사대로만 해 놓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이슬휘는 나운에게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달래면서 고개를 들었다.
군졸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늑대들은 그 서슬에 이미 모두 달아나고 없었다.
“자, 그럼 이제 나는 돌아가자.”
이슬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슬휘의 주변에 초원의 바람이 쏴아아, 소리를 내며 밀려오고 있었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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