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역사위원회] 18화

2018-09-28 17:57
center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데일리게임] 18화
반행성연합(2)

“앤지 씨는 어디 있습니까? 정말 옆방에 있습니까?”
이슬휘가 묻자 양은모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 그건 그냥 예를 든 건데……. 앤지 씨는 저희가 비밀 장소에 보호하고 있는데 지금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오면 만나게 해 주실 건가요?”
“그건 이슬휘 씨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뭘 하면 되죠?”
“우리를 믿고 우리를 도와 함께 일하겠다는 약속.”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슬휘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행성연합이나 행성역사위원회는 지구의 역사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나쁜 편이 되고 자기는 그 하수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사실 이들의 주장도 말뿐이지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저를 믿게 하시려면 더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저와 앤지 씨가 다신 못 보게 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당신들 말을 믿기에 부족하군요.”
그때 탐지기의 알람이 울렸다.
이슬휘는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앤지가 여기 있는지도 불확실한 지금 자기가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진실이 무엇인지 내가 직접 알아보리라.
이슬휘는 그렇게 다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시겠지만 알람이 울리면 제가 가서 역사를 고쳐 놓고 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일이 시끄러워질 게 뻔하니 일단 저를 보내 주십시오.”
양은모가 앉은 채 이슬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가시면 정말로 앤지 씨를 다시는 못 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버그는 우리 요원이 이슬휘 씨 대신 가서 처리하고 왔으니 걱정 마십시오.”
“뭐라고요?”
이슬휘는 반문하며 손목의 탐지기를 봤다. 알람이 꺼져 있었다. 확인해 보니 아카식레코드도 정상이었다.
이슬휘는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한 거죠?”
“저희도 타임머신이 있습니다. 행성연합이 하는 건 저희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저희가 이슬휘 씨 타임머신과 연동을 시켜 놨죠. 그러니 행성연합에는 이슬휘 씨의 타임머신이 작동한 걸로 기록될 겁니다.”
이슬휘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이리로 오십시오.”
앤지는 안내에 따라 한 방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한쪽 벽면의 테이블에는 간단한 다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처음 이들에게 납치 아닌 납치가 되어 왔을 때 공포에 떨며 앉아 있었던 곳이었다.
이제는 그런 공포감은 없었지만 대신 그 자리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앤지는 이슬휘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이슬휘를 만나면 지금의 이 혼란스러움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것만 같았다.
“슬휘 씨는 어디 있나요? 지금 바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앤지는 의자에 앉자마자 다그쳐 물었다.
앤지를 안내했던 사람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조만간 만나실 수 있지 않을까…….”
앤지가 짐짓 화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아니, 뭐예요? 여기 오면 만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 아직 미팅이 안 끝나서…….”
당황한 안내 요원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앤지는 그 모습을 보고 더 강하게 쏘아붙였다.
“나한테 믿으라고, 믿어 달라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진짜로 믿을 수 있게 보여 달란 말이에요! 여기 진짜로 슬휘 씨가 있기는 있는 거예요?”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바로 알아보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안내 요원은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앤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가벼운 웃음을 날려 주었다.

***

양은모는 이슬휘를 안내해서 기지 내부를 전부 보여 주었다.
“이 타임머신의 경우 이슬휘 씨가 쓰는 것과 달리 다수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은모는 타임머신 앞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한 사람이 달려와 양은모에게 뭐라고 작은 소리로 보고를 했다.
양은모가 이슬휘를 힐끔 보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슬휘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로 옮겨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럼, 이슬휘 씨. 앤지 씨를 만나러 가실까요?”
양은모가 다시 이슬휘 옆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이슬휘는 앤지를 만난다는 말에 기대와 안도와 기쁨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슬휘는 양은모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앉아 있던 앤지가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앤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슬휘는 앤지를 향해 달려가서 마구 껴안으려다가 주춤거리며 앤지의 손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데는 없고요?”
앤지는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네, 이 사람들이 잘 대해 줘서 잘 지냈어요. 근데 좀 혼란스럽기는 해요.”
“그럴 거예요. 나도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같이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도록 해요.”
“근데, 슬휘 씨. 정말 외계인이에요?”
“아, 그, 저…….”
참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이슬휘는 스스로를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지구인들에게 외계인이란 생긴 것부터 다른 이상하고 신기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지 않던가.
이슬휘는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앤지 씨. 진화라는 건 말이죠,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라면 생명체의 진화 방향도 비슷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생김새도 다 비슷비슷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슬휘 씨가 외계인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생각해 보니 이제 제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슬휘 씨밖에 없더라구요.”
앤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슬휘는 얼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앤지에게 쥐어 주었다.
앤지가 눈물을 닦아 내는 걸 보며 이슬휘는 다짐을 했다.
아무리 아카식레코드가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사람을 끝까지 지켜 주리라.
그때였다.
탐지기의 경보음이 울리며 앤지가 사라져 버렸다.
전과 같은 상황이 또 발생한 것이었다.
양은모가 침통하게 말했다.
“행성연합에서 또 장난을 친 것 같군요. 어떻게든지 앤지 씨를 소멸시키려고 작정했나 봅니다.”
“그럼 제가 가서 과거를 고치더라도 앤지 씨를 구할 수 없단 말인가요?”
“아닙니다, 가능해요. 저희가 지난번처럼 약간의 작업을 해서 앤지 씨를 되돌려 놓겠습니다.”
“이게 정말 행성연합의 짓이라면 그들이 눈치채지 않을까요?”
“지난번에 소전거사 임무 때 잠시 탐지기가 오작동한 적 있었죠?”
“네, 그래서 위원회에 보고도 했었습니다.”
“그게 저희가 앤지 씨를 되돌리는 작업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땐 약간 실수가 있었는데 이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앤지 씨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게 행성연합의 짓이란 건 확실합니까?”
“그럼 이렇게 해 볼까요? 먼저 이슬휘 씨가 가서 역사를 고치고 오십시오. 그러고 왔는데도 앤지 씨가 계속 없으면 그때는 행성연합의 짓이란 걸 확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거를 고쳤는데도 현재가 안 고쳐진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죠.”
“이슬휘 씨가 그걸 확인하고 나면 저희가 다시 가서 앤지 씨를 되돌려 놓고 오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럼 타임머신은 여기, 저희 걸 쓰십시오.”

***

이슬휘는 무거운 마음으로 과거로 돌아갔다.
급한 마음에 건성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다시 돌아왔더니 역시, 앤지는 여전히 없었다.
“근데 우리가 앤지 씨를 되살려 놓더라도 행성연합이 또 무슨 짓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슬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은모가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물론 그럴 겁니다. 처음 몇 번은 자기네들 오류라 생각하고 반복 시도를 하겠죠. 그래도 자기들 뜻대로 안되면 틀림없이 대규모 조사단을 보내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할 겁니다. T17E의 실종 건도 있으니까요.”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은모가 이슬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슬휘 씨는 앤지 씨를 지켜 주고 싶으신 거죠?”
“네, 물론입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일단 거기까지, 앤지 씨를 지키고 보호하는 데까지만이라도 우리가 함께하면 어떨까요? 이슬휘 씨가 앤지 씨를 지켜 주십시오. 그럼 그동안에 저희는 앤지 씨에 대한 행성연합의 음모가 뭔지 밝혀내겠습니다.”
이런 제안이라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앤지 씨를 되돌려 주십시오.”
“네, 그러지요.”
양은모가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저 말리 있던 사람이 가까이 오며 인사를 했다.
“아니, 당신은……?”
이슬휘는 깜짝 놀라며 그 남자와 양은모를 번갈아 쳐다봤다.
양은모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과거의 현장에서 몇 번 조우하신 적이 있죠?”
“안녕하세요?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윤선용이라고 합니다.”
윤선용이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그는 이슬휘가 소전거사의 임무 때 봤던 말 탄 남자였고 장수왕 임무 때 봤던 군졸이었으며, 동시에 이슬휘의 대문 앞 CCTV에 잡힌 얼굴이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은모가 소개를 해 주었다.
“윤 팀장은 저희 쪽 현장 요원들의 팀장입니다. 그동안 이슬휘 씨에게 신분을 밝히지 못한 점 이해해 주십시오.”
윤선용이 다시 한 번 이슬휘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제가 가서 앤지 씨를 되돌려 놓고 오겠습니다.”
윤선용은 타임머신으로 들어갔다.
윤선용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시 나타났고 동시에 앤지도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이슬휘는 너무나 반가워서 그만 앤지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

“더 궁금하신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휴게실에는 이슬휘와 앤지만 남아 있었다.
이슬휘는 행성연합과 행성역사위원회, 그리고 자기의 임무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자기가 들은 반행성연합에 대한 이야기도 빼먹지 않았다.
앤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슬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제가 윤 팀장님과 함께 과거로 가서 슬휘 씨를 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런 이야기 믿지 못했을 거예요.”
“네? 과거에서 저를 봤다고요?”
“네. 거기서 알은체하면 안 된다고 해서 멀리서 지켜만 보다가 돌아왔죠.”
“아, 그러셨구나…….”
“저, 앞으로 이슬휘 씨가 과거로 갈 때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네? 그건…….”
이슬휘는 뜻밖의 요청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앤지가 얼굴을 이슬휘에게 바짝 가까이 대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슬휘 씨는 저를 보호하고 지켜 주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앤지 씨를 지켜 드릴 겁니다.”
“그럼 제가 항상 이슬휘 씨의 보호망 안에 있어야 하는 게 맞죠?”
“그러셔야죠. 어딜 가시면 꼭 제게 말씀해 주시고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슬휘 씨가 과거로 간 사이에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쩔 거예요?”
“아니, 그런 억지가…….”
순전히 앤지의 억지였지만 생각해 보면 앤지와 같이 과거로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과거의 봄 산길을 걸으며 앤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좋아요. 그럼 같이 가도록 해요. 대신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준비를 좀 해야 해요.”
“무슨 준비요?”
“기억 이식이라고, 과거의 어느 시대 어느 지역으로 갈지 모르니까 시대와 장소에 따른 언어와 지식을 앤지 씨 기억 속에 심어야 해요. 그리고 말 타기나 무술 등 간단한 생존 기술도 이식해야 하고…….”
“오케이!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좋아요. 그럼 같이 가는 걸로 약속하신 거예요?”
“네, 약속합니다. 대신 여기 있는 타임머신을 사용할 때만 같이 갈 수 있어요. 제 거는 1인용인 데다 위원회에서 바로 알 수 있거든요.”
“네, 그래요. 그럼 슬휘 씨도 계속 여기 것만 사용하셔야 해요, 알았죠?”
앤지는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이슬휘도 그런 앤지를 보며 입꼬리가 귀에 닿을 만큼 소리 없이 웃었다.

나비의꿈 작가

주요뉴스